뇌졸중 환자와의 시간 - ⓻
아아와 함께 낱말공부를
재활병원인 홀리병원에서의 식사가 아주 맛있다고 칭찬하는 남편은 조금씩 알아듣는 횟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훨씬 많았고 자꾸 질문내용을 되묻는게 불편하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편이었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면회신청이 가능했고 외출 외박은 미리 간호사실에 알리고 정하면 되었다. 시댁 식구들과 남편 친구, 지인이 다녀갔고 그 와중에 친구에게 담배 좀 달라고 하소연해서 말리느라 애먹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돈도 담배도 건네면 절대 안된다고 면회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재활치료는 평균 하루 3시간 정도였다. 전화 통화도 간단한 내용은 가능할 정도로 진전이 있었다. 나는 유아용 낱말카드를 사서 만날 때 단어 말하기를 시켜보고 혼자서도 반복해보도록 일러주었다. 언어치료시 사용했던 방법을 얘기해주길래 딸이 선생님이 되어 전문가의 방법을 모방해서 낱말카드 몇 개씩 보여주고 기억해서 알아맞히기 게임도 했다. 자신의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외출시 커피숍에서 빅사이즈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고 유아용 캐릭터가 그려진 두툼한 낱말카드를 소중히 안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직도 금단증상이 관찰되었지만 짜증과 화가 상당히 누그러져 가는 모습이었고 자신의 사라져버린 언어에 대한 절박감이 느껴졌다. 병실에 돌아가 혼자서 열심히 연습해보겠노라 약속하며 본인이 의지를 불태우니 안도감과 함께 희망의 불씨가 보이는 것 같았다.
서울재활병원으로
통합간병이 적용되는 병원이라 간병에서 자유로워지니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고, 남편에 대한 심적인 힘겨움도 가벼워지며 어떻게 치료에 도움이 되어야 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력서 제출하고 면접 보러 다니며 한 주를 보냈고 그 와중에 대기하던 서울재활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11일 만에 다시 전원을 하게 되었다.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도 친해지고 밥도 맛있다 하고 치료의 연속성을 생각하면 아쉽긴 했지만 여러 이유로 옮겨가게 되었다.
회복기 재활병원이라 언어치료, 인지치료가 건강보험이 적용돼서 병원비 부담도 줄고 집에서도 15분 거리라 자주 찾아갈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7인실에 배정되었고 너무 북적거릴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복도며 병실이며 널찍하니 답답하지 않아서 좋았다. 재활 시간표는 하루에 기본적으로 4시간 이상 치료를 받는 일정으로 정해졌다. 입원 당일 각 분야 담당자들이 상담하고 확인하고 미리 알리고 하는 과정을 보니 체계적으로 잘 진행되는 병원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왠지 든든한 기분이었다.
면회는 월~토 오후 6~8시에 가능했고 일요일은 오전 10~12시가 추가되는데 단, 주보호자나 부보호자 동반하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물론 외출 외박도 23시간 이내에 가능했다. 2~3일 간격으로 빨랫감 받아오고 세탁해둔 수건과 양말 옷 등을 가져다 주었다.
면회를 가보면 남편은 이어폰을 끼고 인상 쓰며 뭔가를 적고 있었다. 아프기 전에 늘 끼고 살던 전자책을 듣는데 전혀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줄거리는 물론이고 낱말, 문장 다 듣기 어렵다고. 어쩌다가 하나씩 들리는 단어를 적어보고 있다고 했다.
문장이 길고 내용이 어려워 그럴 수도 있다고 위로하며, 이런 시도를 하고 열심인 자세 자체가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었다.
혼자는 힘들어
재활병원 입원 후 매일 한 번씩은 전화 걸어 대화하는 것을 루틴으로 삼았다. 병원에서 일주일에 2~3회씩 하는 언어치료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족들이 곁에서 계속 말을 많이 해주어야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담당 주치의 조언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오늘은 어땠는지, 일과와 식사와 치료에 대해 한참 얘기 나누다가 화제를 전환하면 다시 못 알아듣고 딴소리를 하곤 했다.
뇌에서 삭제된 정보와 단어와 문장을 다시 기억하도록 일깨우고 새로운 정보로 대체하고 서로 연결하고 이런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어야 하겠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쩌면 욕심이겠구나. 기대치를 높게 정하지 말고 적어도 6개월까지는 꾸준히 한다고 마음 먹어야겠구나. 마라톤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목숨은 건졌고 사지도 멀쩡하고 급한 불은 껐다. 이제는 빨리 나의 일상을 되찾고 이 사람을 지지해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며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최대 6개월 병가가 가능하다는 회사 방침을 설명해도 정작 본인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이전에 복직해야 한다는 조급증이 있어 보였다. 노트북으로 거래처 이메일 확인해야 하고 그동안의 업무를 정리해두어야 한다고도 했다. 일상적인 대화도 막히고 책을 읽어도 내용 파악 안되는 사람이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타박하며 치료에 집중하라고 했지만 그 부담감을 쉽사리 떨치지 못하고 늘 노트북을 곁에 끼고 지냈다.
30년 가까이 직장생활 성실히 하며 열심히 살았고 가장이라는 부담감에 잠시라도 쉬는 것을 못견뎌했던 남편의 뇌 한쪽은 지금도 단단히 고정된 채 그대로인 것이다. 환자가 되어서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장의 무게로 말이다. 그새 짠한 마음이 굴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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